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미노 요시유키 (문단 편집) == 생애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attachment/토미노 요시유키/1969.jpg|width=100%]]}}}|| || ▲ 1994년 사진. [[안노 히데아키]]와의 대담을 묘사했던 잡지의 사진으로 당시 53세. || 토미노의 아버지는 고무를 다루는 기술자로 과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투기 회사의 여압복을 만드는 직원으로 일했으며, 패전 후 [[명령불복종]]을 각오하고 남긴 여압복 자료가 자기 애니메이션의 원점이 되었다고 말했다.[* [[아사히 신문]]에 연재된 '아버지의 등'에서.] 다만 이것은 옛날에 아버지의 명예를 생각해서 좀 낮춰서 말한 것 같으며 훗날 다시말한 바로는 아버지는 고무 부품 전문가로서 전투기, 폭격기의 부품 제조는 물론 미군에 사상자를 낸 풍선 폭탄의 제조, 죽음을 강요하는 [[특공]] 병기 개발에도 관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의 공장에 놀러갔을 때 신나서 놀았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병사로 전장에 끌려나가기 때문에 한 것이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그래서 전쟁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말려들게 하는구나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이 저런 일을 한 것을 '''과거의 영광'''으로 여기고 '''전혀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랑 싸우고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경험은 그의 작품 이곳저곳에 들어간다. [[http://ghibli.jpn.org/report/sacla-tomino/|#]] [[https://www.asahi.com/and_M/20191229/8595254/|#]] [* 대표적으로 [[템 레이]].] 당시 이런 기술자들은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에 전시나 전후에도 굶지는 않고 있는 집 도련님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그가 인생 최대의 라이벌로 꼽는 [[미야자키 하야오]]도 동일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토미노의 아버지는 96세까지 장수했는데 단 한 번도 화해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일단 아버지의 여압복이나 설계도가 자신의 원점이라고 생각은 해서 자신의 전시전에 자료를 전시하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다녔을 땐 [[이지메|집단 따돌림]]을 겪었는데, 그 이유도 처음엔 몰랐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카미유 비단|자기가 먼저 그들에게 싸움을 걸었던 게 원인]]이었다고 한다... 이무렵 [[데즈카 오사무]]의 아톰 대사를 읽고 부모님께 소년 잡지 구독을 요청하기도 했었고, 화가가 되어 보려고 생각했으나 몇년 못가 영화에 새로 관심을 가져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니혼대학]] 예술학부 영화과로 입학했다. 처음엔 학과에 맞게 [[일본 영화|영화계]] 진출을 생각했으나 영화계에 발을 들이는데 실패하고[* 대학 졸업하던 무렵, [[TV]]가 마구 보급되는 시기여서 사람들이 다들 TV만 보느라 당시 영화 산업은 파탄 직전이어서, 전 영화사들이 대졸자의 채용을 갑작스레 중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토미노가 상당히 과장해서 말한 것이다. 결국 영화인보다 만화인이 밑바닥에 있는 열패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 인터뷰에서 드러나지만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이라는 후대의 인식과 달리 토미노 본인은 영화인이 되지 못하고 애니메이션인이 된 것을 무척 부끄럽게 생각했다.] 엄마로부터 [[데즈카 오사무]]의 회사 [[무시 프로덕션]]의 채용 소식을 듣곤 학교 축제 준비 기간 동안 채용 면접을 받아 합격해 입사하였다.[* 훗날, 당시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은 주로 아이들이 보는 매체란 인식이 깔려 큰 어른이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는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고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영화계에 진출할 때까지 잠시 애니메이션계에서 일하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못했고, 결국 계속 여기서 일하게 되었다. 입사 초기엔 [[제작진행]] 및 연출 보조를 주로 맡았는데, 토미노는 그때 자신보다 어린 직원이 능숙하게 그림을 그리는 것에 충격을 받아[* 대졸자를 뽑는 게 아니고 중고등학생도 실력만 있으면 뽑는 회사라 선배가 자기보다 어렸다고 한다.] 그에 뒤지지 않는 일을 고민 끝에 애니메이터는 포기하고 콘티 업무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손이 부족해 펑크가 났을 때 자신이 스토리까지 구상한 미완성 콘티 '로봇 휴처'를 만들어서 올렸더니 [[데즈카 오사무]]가 그걸 보고 "이거 뒷 내용이 어떻게 되는 거지?" 라고 말을 걸어 이러저러한 내용이라고 했더니 "넌 오늘부터 연출이다." 라고 해서 그 에피소드는 그 내용대로 방영되었고 입사 3개월 만에 각본, 연출로 승진했다고 한다. 그렇게 빨리 승진한 건 자신 밖에 없다고 한다. [[https://futabasha-change.com/articles/-/154?page=3|#]] 1964년 11월 방영된 96화에서 (다른 명의 활용) 연출을 맡으면서 데뷔하여, [[철완 아톰]]의 20여 에피소드 연출과 콘티, 각본을 담당했다. 몇년이 지난 1967년, 교제하던 광고 업계 여성이 광고 일을 같이 하자고 제안해 무시 프로덕션에서 나와 오오타키 프로덕션(가칭)[* 자서전 '그래서 나는' 에서 언급한 가칭. 회사에 민폐라며 정확한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또 다른 자서전 '턴에이의 치유'에서는 시노 프로덕션이라고 불렀다.]이라는 광고 회사에 들어갔으며 도쿄 디자이너 학원에서 강사 활동을 겸하며 CM 제작 참여를 했다. 그러나 이듬해 교제하던 여성이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켜 토미노는 오오타키 프로덕션을 퇴사하고 그 여성과 헤어진 토미노는 프리랜서 연출가로 전업해 애니메이션 업계로 돌아왔다. 이후 타츠노코 프로덕션의 작업 수주를 시작으로 [[TMS 엔터테인먼트]], 닛폰 애니메이션 등의 제작사에서 콘티를 작성하다가 1971년 중매로 만난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 결혼식에서조차 토미노는 그림콘티 용지를 놓을 수 없었다고 후에 말했으며, 이 무렵 이사를 간 사이타마현의 니자 시는 무적강인 다이탄3에서 출현한 신 시티의 원형이 되었다.] 이듬해 [[바다의 트리톤]]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선라이즈]]의 창립멤버는 아니지만 ([[야다테 하지메]]를 원작 펜네임으로 내세우는) 선라이즈의 창립멤버 대부분이 무시 프로덕션 출신이어서, 이후에는 주로 선라이즈의 작품에 참여한다. 선라이즈가 프리랜서를 쓰는 방침의 회사였으므로 토미노도 사실 선라이즈 전속이 아닌 프리랜서였고 선라이즈에 주로 있었을 뿐이지 다른 회사 작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의 작품 활동이 없어도 선라이즈에 계속 출근해 얼굴을 비추고 감수를 돕거나 아이디어를 낸다고 한다. 그래서 토미노를 만나려면 선라이즈로 가야한다고 한다. 선라이즈가 반다이 남코 필름 워크스로 통합된 이후로는 그쪽으로 출근한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